포스코가 작년말 베트남 법인(POSCO SS VINA)을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3911억원을 증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트남법인 지분 49%를 일본기업에 1억 달러(약 1200억원)에 넘기는 동시에 이뤄진 자체 자금 수혈이다. 부채비율이 7502%에 이르는 베트남법인을 '어떻게든 살리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하지만 포스코의 '생존 몸부림'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한국 기업도 있다. 바로 국내 형강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현대제철과 동국제철이다. 포스코 베트남법인이 일본 기업과 손잡고 국내에 '베트남산 포스코 형강'의 수출을 늘리면 시장 점유율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주식 6623억원 가치, 0원
17일 업계에 따르면 포스코가 베트남 법인 증자를 위해 이사회를 연 것은 작년 12월13일이다. 이날은 포스코가 베트남 법인의 전략적 투자자로 일본 형강회사 '야마토그룹(Yamato Kogyo Group)'을 유치했다고 발표한 날이다. 베트남법인은 철근 사업부는 매각하고 야마토그룹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형강 중심으로 사업구조도 개편했다.
사명도 'POSCO SS VINA'에서 'POSCO SS VINA JOINT STOCK COMPANY'로 바꿨다. 포스코가 100% 보유한 '해외 자회사'가 '한일 합작사'로 바뀐 것이다. 당시 포스코는 야마토그룹의 투자금액을 밝히지 않았지만 외신에 따르면 야마토그룹은 1억 달러(약 1200억원)에 지분 49%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법인은 2015년 철근 50만톤·형강 50만톤 등 연간 100만톤 생산 규모를 갖춘 공장을 완공, 가동하고 있지만 베트남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법인의 작년 당기순손실은 3456억원. 부채비율은 7502%에 이른다.
포스코가 베트남법인에 투자한 자본금 6623억원의 가치는 '0원'이 됐다. 포스코는 2018년 베트남법인의 초기 자본금 2414억원을 손상차손(비용)으로 처리한 데 이어 작년 말 증자대금도 곧바로 전액 손상차손으로 인식했다.
※손상차손
회사는 미래 수익을 기대하고 설비 등 자산에 투자한다. 하지만 앞으로 이 자산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미래회수가능액)이 줄어들 것으로 분석되는 경우, 그 감소치 만큼을 손상차손으로 인식한다. 자산의 장부가는 손상차손 만큼 감소되고, 그 만큼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 낯선 곳에서 낯선 사업
포스코가 베트남 시장에서 홀로서기에 실패한 이유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업'을 벌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포스코 베트남 법인의 사업 아이템인 형강·철근은 아파트 등 건설 때 콘크리트 보강용으로 사용되는 건축용 철강재로 그간 중소형 철강업계가 주로 생산했다. 철강업계 '맏형'인 포스코는 이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진출 당시에도 형강·철근이 특수강에 비해 경쟁이 치열하다는 점, 형강·철근의 생산과 판매 경험이 없다는 점 등이 리스크 요인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포스코는 베트남의 사회기반시설 건설 붐, 빠른 경제 성장 등 장밋빛 투자 전망을 믿고 '해외 신규사업'을 벌였다.
포스코는 생산 공장과 함께 항만까지 건설했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중국의 값싼 제품이 동남아시아 시장에 쏟아지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지난 1월 기업설명회(IR)에서 임승규 포스코 재무실장은 "베트남 법인은 내수 경쟁 심화에 따른 가격 하락과 생산 판매량 감소로 적자폭이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 포스코·야마토 손잡자…현대제철 긴장
포스코가 베트남 법인을 살려내겠다는 구조조정안 뉴스는 동남아시아보다 한국 철강기업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밀린 포스코가 국내 시장에 '베트남산 포스코 형강'의 '수출' 물량을 늘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형강과 철근 등을 포함한 국내 봉형강 시장은 현대제철과 동국제강 등이 선점하고 있다. 작년 3분기 기준 봉형강 매출을 보면 현대제철 5조1217억원, 동국제강 1조9518억원 등이다. 특히 현대제철은 전체 매출의 29.2%가 봉형강에서 나오고 있다.
국내로 수입되는 베트남산 형강은 포스코가 베트남에 공장을 설립한 2015년 이후 2배 넘게 증가한 상황이다. 여기에 현대제철이 해외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야마토그룹이 포스코와 베트남에서 손잡으면서 긴장감은 더 높아지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포스코가 해외를 개척하겠다고 베트남에 진출했는데 물량이 소화가 안 되니 한국으로 들여와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다"며 "거기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포스코가 야마토와 합작했는데 사실상 일본산 제품이 한국에 수입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2015년 저가의 중국산 형강에 대해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며 겨우 막았는데 베트남산이 중국산을 대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반덤핑으로 중국 수입물량이 줄자 수입업자들의 피해가 커졌고 수입업자들이 생존을 위해 중국산 대신 베트남산 형강을 수입하고 있다"며 "국내 일부 철강회사가 싫어할 수 있지만 시장 전체적으론 물량이 많아져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